Friday, July 24, 2015

2015년 7월

7월 1일부로 석사를 마쳤다.
아이둘을 데리고 뭔짓을 하는것인지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논문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 나이에 창피해서 별로 알리지도 않았다.
친구는 오히려 동네방네 소문내야지 뭐가 창피하냐고.. 했지만..
석사 졸업생 평균연령이 25-26세이다..
애들 둘 고생시키면서 이까짓걸 왜 해야했는지 스스로에게 창피했다.
다른 엄마들은 애들을 위해 오히려 모든 걸 포기하는데.. 난 왜 이걸 했어야 했는지..
아마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주 솔직하게 나자신을 스스로 가루날리도록 씹어보자면..

첫째는.. 고딩때 트라우마 때문에.. 그걸 극복해야 할 거 같았다.
(고딩때 공부못한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아주 잘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우울함에서 십여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입시교육의 폐해라 하겠지만..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고.. 그땐 선지원후시험에 단 한번의 기회 뿐이었던 옛날 옛적이라.. 단 배팅과 단 한번의 기회로 모든 게 끝이었다.) 이 트라우마가 굉장히 컸다.

 둘째는.. 첫째와 같은 맥락이지만.. 그 이후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를 못했다.. 한마디로 성실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막 나갔다는 건 아니지만.. 세상은 흑백은 아니다.. 성실하지 못해도 쭉 갈 길을 가긴 했다. 하지만 대충 갔다.
너무 당연하고 너무 많이 떠드는 얘기지만 정말로 공부를 잘한다는 건 머리가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백프로 성실성인 것 같다. 이 성실성이 공부에만 중요한 건 아니다.. 자신이 안다. 성실하지 않았을 때의 그 허무함을.. 그냥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아닌척하고..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그 허무함.. 뭘 해도 꽉찬 느낌이 오지 않는 그 공허함.. 성실하지 않으니까.. 남들보기에는 성실해보여도.. 요령좋은 아이들은 그걸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안다.. 그리고 순간집중력으로 결과를 비슷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진심으로 안다. 순간집중력으로 메운 것과 꾸준히 성실하게 체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자기자신 내부에 큰 차이인지를.. 이건 공부를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성실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공허감은 일상생활을 지배한다.. 뭔가 배가 든든하게 차 있는 기분이 아니라..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느낌..
성실성은 따분하게 심히 반복적인 일조차도 mastery를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스스로 되돌아오는 게 없어도 끝까지 하는 신체적훈련이다. 두뇌도 신체의 일부이고 공부는 두뇌만이 하는 건 아니다. 손도 움직이고 눈도 움직이고 심지어 등도 따라줘야 하고 다리도 저리고 엉덩이도 배긴다.. 이 모든 신체가 견디어줘야 한다..고딩때의 이 성실성이 사라졌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하고 결과를 만들어냈을때 느껴지는 그 꽉찬 느낌.. 이건 든든한 자신감과 배짱으로 쌓이게 된다. 나라는 인간의 내부 stability 라고 하면 될려나..흔들리지 않은 중심같은 게 생기는 거 같다..  미안하다. 영어 잘 하지도 못하면서 영어느낌이 더 와 닿는 건 뭐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 중심이 아주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물론 지금도 뭐 중심 꽉 선거는 아니다.. 하지만 뭘 해도 불안한 거 같은 느낌.. 허공에 탑쌓는 거 같은 느낌.. 그게 사라지지 않았다.. )

셋째는..결국 같은 얘기지만.. 나 자신과 내 부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특히 덴맠1기를 끝내고 다시 들어갔을때는.. 덴맠경력 잘 내세워서 좋은 직장 가서 서울서 도시생활 누리며 살리라 정말 그 생각이었다.. 뭐 젤로 크게 상상한거는.. 외국계가자..정도.. 것두 아이비리그 출신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아.. 그냥 어디든 서울에서 안정된 곳으로만 가자는 주의였다. 원래는 덴맠서 2004년에 석사를 들어갔었다. 덴맠1기 직장생활 중에..
그와중에 무슨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한국서 학부때 받은 장학금으로 묶여있던 옵션 5년이 끝이나면 어렴풋이 석사를 하려고 했었고.. 2004년 옵션이 마무리되었을때 그냥 덴맠서 내보기나 하자 하는 기분으로 석사을 냈다가 합격을 했었다.. 그리고는 3개월만에 한국행..
집안에 여러가지 큰 변화가 있었기에.. 또 이곳 회사도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때 한국을 가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을 앞으로 평생 댐으로도 못 막을 거 같은 절박함이 있었고..
석사를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한번 여기서 내었다 덜컹 붙은 거였다.. 그리고 한국을 가야할 이유가 두가지 넘게 생겼었다.. 변명이지만 돌아가야했다.. 결과론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보면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게 빚이 남은 기분이었다.. 매년 석사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살거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올일이 생겼지만.. 석사라도 따서 미안함을 덮고 싶었다.. 석사라도 따면 그래도 명분은 설 수 있을 거 같아서.. 결국은 다 핑계지만..

넷째는..아이들이 자랐을때 대학을 가라고 설득하고 싶어서.. 여긴 대학이 필수가 아니다..
대학가는 수도 너무 적다.. 우리 애들이 대학을 갈지 모르겠다.. 안가도 된다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안가도 먹고사는데는 지장없다.. 하지만 솔직히 느낀다.. 물질적으로는 지장없지만 교육은 엄청난 차이를 사람에게 부여한다.. 물질적으로 의사들과 비서들이 같은 동네에서 같은 크기의 집을 짓고 사는 것이 당연시 되고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안다..교육의 차이가.. 그들의 세상 보는 눈의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이 눈의 깊이가 삶을 살아가는 데는 여기서는 별로 써먹을데가 없는 건 사실이다.. 교수나 수리공나 같은 동네서 서로 이웃하며 서로 존중하며 섞여살고 있는게 여기다 맞다.. 하지만.. 보았다.. 지난 8년동안 극우보수가 집권했을때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교육을 덜 받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극우보수가 재집권이 가능했던 것도.. 그 이후 생겨난 덴맠의 변화들도.. 난 극우진보도 싫어한다.. 정치적으로 공평하기 이딴거 엄청 싫어한다. 무조건 인권 들이대는 것도 엄청 싫어한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 생각이나 다른 이들의 생각에 어느정도의 브레이크 능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차이는 이 브레이크 능력을 결정짓는다.. 난 그걸 덴맠2기때 뼈저리게 느꼈다.. 브레이크 없는 극우보수와 극우진보가 군중심리에 자정능력없이 휩쓸리는것이 이 21세기에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자정능력은 교육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해보는 훈련을 통해서만 생길 수 잇는 것 같다..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이라 비판하지만.. 우리나라가 그나마 그 짧은 기간에 별일 다겪으며그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난 그 주입식 교육속에서도 그 주입식으로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교육을 통해서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기 이후에 교육은 더 중요한거 같다.. 대학은 지식습득을 떠나서 사회에 내던져져서 군중에 휩쓸리기 전에 최소한 나를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단체속에서 나를 다듬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스템화된 기회이다. 난 이걸 우리 아이들이 거치기를 바란다.. 나스스로 이곳 교육환경의 경험이 없기에 석사라도 해서 스스로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야.. 만에 하나 우리아이들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했을때 부모로서 최소한의 경험치에서 설명이라도 해줘서 심사숙고해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밑받침을 만들어두기 위해서.. 그래서 아이둘을 지금 고생시키더라도 석사를 해야할 거 같았다.. 그리고 석사를 거쳐서 조금 고개를 숙이는 법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 위에 뭐가 있을까 들여다 보고 싶기도 했다.. 좀 웃긴 말로 들리지만 더 성숙한 인간들을 (대학간 인간만이 성숙한 건 아니다..하지만 짧은 기간에 훨씬 더 많은 실패와 비판을 통해서 스스로를 좀 단련한 인간들을 / 물론 그 과정속에서도 오만만 깊어지는 안그런 인간도 많다.. 하지만 좀 더 노력하는 인간들을 더 만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만족한다.. 더 만났다.. 그리고 좋은 자극이 되었고..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쓰고보니 웃긴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왜 이리 구구절절 설명을 할까..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설명이다.. 잊지않기위해서.. 생활에 휩쓸리면 원래의 의도는 항상 퇴색된다. 논문이 풀리지 않고 한참 힘들때 그만두고 싶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도 결과를 봐야 할 거 같았다.. 그래야 나중에 설명을 해줄 수 있지.. 결과적으로 113 페이지 논문을 완료했고.. 소프트웨어까지 완성을 시켰으니 밤잠 못자고 피곤에 쩔었던 나나 그 피곤한 나를 상대해준 우리 애들이나 너무 고생했다..
애들이 고등학생되면 의논상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전개된다 과정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애들이 결정을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들어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고..  정말 이 네번째 이유가 세번째와 함께 가장 컸다.  내가 무슨 석사를 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이 이유를 위해서 우리 애들에게 설명해주기 위해 부모인 나도 안해본 일을 하기 싫다는 애들에게 하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뭐 쓰고 보니 별것도 아닌데 엄청 대단한 거 같다.. 그래도 혼자 힘으로 했으니 그건 나스스로 토닥하고 싶다.. 그리고 중요한 아주 단편적으로 그 성실성의 느낌을 다시 맛 본 기분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 기분을 못 느꼈는데.. 뭔가 배가 좀 차게 되는 것 같은 느낌.. 이건 충전된 느낌이다..얼마지나지 않아 사라지겠지만.. 이 느낌을 다시 조금 맛볼 수 있어서 기쁘다..

그외.. 단상.. 석사 논문을 쓰면서 느낀점.. (논문 들어가기전 필수적으로 다 거쳐야하는 각 과목 코스웤과 각 과목별 플젝은 어차피 무조건 팀플젝이었으니 뭐 나도 팀플젝할때 젊은 학생들 서로 열심히 하는데 사공이 너무 많은 거 같아 뒷짐지고 있었던 적도 많았지만....논문은 그래도 1인 1논문일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DK학생들은 논문을 둘, 심지어 셋이서 같이 쓰고 (심지어 100페이지도 안되는 양을 두세명이 공동으로 쓰고) 소프트웨어를 따로 만들지도 않는 애들이 수두룩 했다.
내 자랑이 아니라 솔직히 그게 좀 어이가 없어서.. 열팀이 석사논문을 반년에 걸쳐 작업을 한다면 거의 8팀이 두세명이서 하는 팀작업이었다..
이게 허용되는 것도 신기했지만 공대 논문에 이론만 달랑 것두 팀작업에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게 신기했다.
정말 두명까지는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데 세명도 허용한다는 것은 좀 의아했다. (그런 논문팀은 그 중에 한명은 어쩔 수 없이 freeloader 인 걸 목격하기도 하고.... 일안하고 그냥 거저 먹는.. 근데 이런 거저 먹는 애들이 학점은 또 잘받는다.. 그 세명이서 같이 쓰는 논문팀원 둘이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리서치하고 읽고 분석하고 의논하고 방향제시하고 골머리싸메고 문장 만들어서 페이지 채워나갈때 옆에서 게임하고 있는 걸 여러번 목격한 나로서는..그리고 혼자서 머리 터지게 허리 끊어지게 애들 눈빠지게 하도록 고생한 나로서는.. 좀 많이 어이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열심히 논문 리서치, 글쓰기, 소프트웨어 작업에 매달려 열심히 한 애들은 정말 막판에 뻗는다.. 그래서 석사 디펜스 시험때 이론쪽을 대충하게 되는데..(기력이 다 소진되어버려서.) 다른 애들이 열심히 일할때 놀기만 한 애는 다른 애들이 일끝내고 요약 설명해주는 거 받아먹기나 하고 이론만 준비해서 성적은 더 잘나오더라는.. 이건 정말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 하나... 만약 내가 만에 하나 운이 엄청 좋아서 어느 회사에 소프트웨어팀 팀장이 된다면 반드시 DK애들에게 물어보리라 석사 논문 몇명이서 썼냐고.. 세명이서 썼다고 하면 뽑고 싶지 않을 거 같다. 에효.. 이건 나만 알아도 될 일이나.. 그냥 쓰고 본다. 나중에 지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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